프로필사진
오늘의 엠마
오늘의 엠마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티스토리 뷰

#복수 #정치 #외교 #로판 

#다가지고태어나서 #다가진채끝나는 #진짜금수저 

#개인적인복수였는데 #어쩌다보니 #나라도구하고 #벤츠도잡고 

#본편완결-외전완결 #카카페 #독점연재 #기무 






재작년부터 걸크러시가 전방위적으로 유행하더니 그 연장선상으로 로판에서도 복수물이 많아졌다. 키워드가 동일하니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주인공이 얼마나 비참하게 배신당했느냐, 복수에 제 삶의 가치를 얼마큼 두느냐에 따라 캐릭터의 스탠스와 성장 속도가 달라지므로, 그 재미를 보고자 여러 개의 복수극을 읽고 있다. 그 중 하나인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을, 너 죽고 나 죽자 싶은 처절한 복수극이 읽기 힘든 사람에게 추천한다. 





ㅣ 복수, 해야지. 근데 그것보다 지금의 내 삶이 더 중요해



여주인 스칼렛은 복수에 제 모든 것을 걸지 않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며 일상을 영위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스탠스가 가능한 일차적 이유는 그녀가 진짜 금수저인 데 있다. 왕족이자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 태생부터 가진 권력과 인맥이 그녀의 가장 큰 무기이고, 남주인 공작 칼리드도 그녀의 방어막으로 역할한다. 물론 내내 꽃길만을 걷진 않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흙탕물이 튀는 일은 없다. 1인칭 시점으로 주로 서술되어 스칼렛에 몰입하게 되면 억울하고 화날 수 있겠으나, 한 걸음 물러나 보면 그녀는 중요한 걸 잃은 적이 없으며 금수저인 덕분에 실수를 만회하고 다시 시작할 기회를 남들보다 많이 얻었다.


두 번째는 목숨 한두 번 잃고 회귀하거나 제 삶을 내던질 정도로, 파괴적인 복수심을 가질 정도의 사연이 아니라는 데 있다. 둘도 없는 친구인 이사벨이 일곱 번 남자친구를 뺏었다지만 그녀는 그것을 이유로 복수를 다짐하지 않는다. 어쩌다 읽게 된 편지에서 이사벨이 제게 이유 모를 악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이를 계기로 이사벨의 약혼자인 남주 칼리드를 유혹한다. 어떻게 여러번 애인을 뺏기고도 변함없는 우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의문이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스무번 가까이 연애를 할 정도로 금사빠이자 얼빠이고, 연애 실패 원인을 자신의 상황에서 찾지 않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일에 충실한 것을 보면 수긍이 간다. 애초에 부정적인 감정에 매몰될 만큼 자의식이 낮지 않은데, 이 역시 그녀의 배경에서 많은 부분 기인한다. 


초반부의 서술을 보면 진정한 우정이라서 배신했음에도 믿음이 굳건했다 이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뒷이야기가 풀릴수록 이사벨을 트로피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복수를 다짐한 후 끝의 끝까지 그 악의의 실체를 더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여러 번의 제자리걸음에서, 번번이 '오늘도 한 떨기 백합처럼 예쁘다, 저 얼굴로 울면 모든 걸 용서했어'라며 정말 무수히도 '왜 그 아이를 내내 곁에 두었는가'의 가장 큰 이유로 이사벨의 외모를 언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가치관이 전혀 달라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를 위해 제대로 노력해 본 적도 없다. 따라서 진짜 고민이나 속내를 나눈 적 없으며, 대화의 핀트도 종종 엇나가는 탓에 가벼운 주제의 수다만이 가능한 사이였다. 그럼에도 진정한 우정으로 오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칼렛이 이사벨의 가문에 많은 권력을 쥐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벨 입장에서나 분에 넘치는 것이었지 스칼렛에게는 공작인 어머니의 심기를 어지럽혀 허락을 받아야 할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저 제가 줄 수 있는 많은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애첩의 베갯머리 송사에 아낌없는 사랑을 퍼주는 듯하지만, 선을 넘으면 가차 없이 내치는 권력자의 양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한 이유로, 배신당한 우정에 대한 복수와 애증이 중심 맥락인 듯하지만 실상 메인 플롯은 복수 그 자체라고 봐야 한다. 중반 이후부터 반역과 관련한 떡밥이 대거 나오면서 이사벨의 가문이 엮여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이야기가 시작될 때 시에라와의 종전 협상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이야기 전반에서 이게 가장 중요한 떡밥이다. 주인공들의 나라 윈체스터는 시에라에 크게 패전하여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종전 협상을 한 적 있는, 말 그대로 백 년의 원수지간이다. 그런 시에라의 도움을 받아 반역을 꾀하던 이사벨네 가문을 타겟으로 한 복수의 덫이 얼마나 촘촘하게 짜였는지, 또 이에 개입한 시에라에게 어떻게 역사적인 굴욕을 톡톡히 갚는지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 과정에서 외교관이자 소공작인 여주의 활약이 통쾌함은 물론이다.





ㅣ 현실적이고 모순적인 여주와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남주

 


금수저보다 엄친딸 키워드가 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일단 엄친딸이라기엔 그녀 스스로 고귀한 혈통에 대한 언급이 잦아 내 주변에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전제에 맞지 않고, 이후 언급할 이유로 해당 단어의 핵심 맥락인 '여러모로 완벽한 인물'에 부합하지 않아서다. 


여주 스칼렛은 업무에 있어서 합리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같으나 따져보면 상당히 경험주의적 인물이다. 첫 에피소드인 시에라와의 종전 협상에서 직관과 순간의 감각적인 판단에 따라 목숨을 담보로 고지를 선점하는데, 그 과정이 독단적이고 거칠다. 소소한 언행과 소품까지 많은 계산을 바탕으로 하는 외교관이라는 직업 설정에 있어서 억지스럽게 걸크러시 요소를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우려스러웠으나, 이후 여주의 행보를 보면 그녀의 성격이 그래서 그랬구나 이해하게 된다. 


여주는 의무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하는 인물이지만, 성품으로 봤을 때 이상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좋게 말하면 애살스럽고, 있는 대로 말하자면 오만하고 위선적이다. 사려깊고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스럽게 말하지만 그건 자신의 바운더리 내에 있는 제 편에 한정된다. 곁을 내줄 사람, 이용할 사람과 패를 구분함에 있어 제 이익과 평판을 최우선시하는 계산이 숨 쉬듯 자연스럽고, 필요에 따라 가문과 왕가의 위용을 빌려오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이 내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지'라며 주변인들을 활용하는데, 이때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어필하거나 판을 짜주지 않는다. 의뭉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악행을 종용하고 자신은 품위를 지킨다.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며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그런 시녀질을 시키는 것 자체가 품위와는 거리가 먼 행위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런 식으로 악역을 벗어나며 자신만의 순수를 유지한다. 사람을 가지고 놀면서도 악행을 자각하는 행태의 수위는 어머니가 봤으면 품위 없다고 혼나겠다 정도이지 반성이나 자성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한다. 


이사벨과의 독대나 외교 사안을 고민하며, 본인이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독백이 많이 나오지만, 이후 행보를 보면 변한 것이 없다는 것도 특이한 설정이다. 우리가 잠자리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잘못을 반성함에도 다음 날이면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낸 뒤 반성을 반복하는, 그 정도의 가벼운 수준이라 사건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어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사고의 흐름을 보면 스스로를 정의롭고 괜찮은 어른이라 믿고 있어 기실 그 반성들은 무의미에 가까운 막연한 것이므로 납득되는 전개다. 예컨대, 이사벨을 단죄하고자 극한으로 몰아붙이던 낭독회에서, 잘못된 수단을 선택한 이유의 모든 당위성을 제가 가진 권력의 책임에서 찾고 이후 자신의 저열함에 반성하지만, 정작 이사벨의 가문이 심판받을 때엔 정치는 머리 아프다며 남들이 알아서 하겠지라며 책임에서 한 발 물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악역을 회피한 채 칼리드와의 연애에 열중한다. 치열하게 전개되던 생각들은 이사벨의 악의의 실체를 명징하게 확인하여 인연을 끊어내기 위한 단계였을 뿐, 사회적 관계나 행동 기제의 기본적인 스탠스는 변함없다. 어쩌면 진짜 우정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잃은 것이 없기에 배운 게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또한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 굳게 믿어 호감을 당연하게 여기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상황을 보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중심적이라 징징댈 거 다 징징대는 '정석적인 드라마퀸'의 면모도 남다르다. 남이야 어떻든 내 손에 박힌 가시가 가장 아픈 캐릭터의 내면을 정말 잘 풀어냈다. 자기애 넘치는 1인칭 서술이므로, 객관적 사실과 무관하게 스칼렛은 상당히 사랑스럽고 합리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특히 부정적인 면모들은 꽤 회차를 두고 서술돼 그녀의 모순점을 찾는 재미가 있다. 1) 자신이 상대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언젠가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이익 관계를 위한 관계 형성 행위이자, 동시에 상대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좋은 기회를 베푸는 것이지만, 그 반대는 예상조차 못 해본 이중잣대 하나. 2) 이사벨이 시선을 끌며 등장하자 '쟤는 미모가 권력의 근본인 줄 안다'며 저급한 가치관을 가진 여성으로 매도하며 이해할 수 없다 말하는데, 지난 세월 그게 가능하다 믿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스칼렛 본인이라는 것 하나. 3) 이사벨이 처연하게 연기하듯 울면서 변명을 늘어놓자 우는 행위 자체를 빈정대는데, 네가 그렇게 그림같이 울면 마음이 아프다며 어떠한 잘못도 용서하던 것 또한 스칼렛이었다는 것 하나. 4) 브룩스 켈트와의 대화에서 혁명 세력이 활동하게 된 이유를 들으며 그가 짚어낸 신분제의 모순점과 사회비판적 시각을 인정하면서, 진정으로 고민하고자 하는 긍정적 의미의 귀족적인 모습을 보이며 변화를 예고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끝내 어떠한 적극적인 액션을 취한 바 없고, 이후에도 여전히 신분제의 유리함을 이용하며 상황을 타개하는 부정적 의미의 귀족적 모습 하나. 판단컨대, 애초에 혁명 세력의 아픔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으므로 깊이 있는 고민 또한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순간의 감상에 휘말려 적선하듯 보인 관심이었거나 그저 한 번 생각해볼 정도의 중요치 않은 논제로 받아들였지 않나 싶다. 우리 다수가 아프리카 빈곤지역의 전염병에 안타까워하며 문제 의식을 느끼지만, 적극적인 방안을 고안하고 행동하는 이는 거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따지고 보면, 최고권력 집단 내에서 태어나 길러진 이가 고작 한 번의 계기로 새로운 사고가 열린 양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선이기도 하다. 태생부터 주어진 존경과 호감만큼이나 시기와 악의에도 자주 노출되었을 것이므로, 결국 그녀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제 이익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에 한정되는 것 또한 이해된다. 이처럼 가진 자들만이 부릴 수 있는 오만과 여유를 제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거리낌 없이 활용할 줄 아는 진짜 금수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너무나 로판답게도, 그녀의 성장은 엄청난 사건사고가 아닌 칼리드의 아낌없는 사랑 하에 실현된다. 삶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지만 사랑에 대한 정의와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 대한 인식 면에서는 대단한 성장을 보인다. 거기다 현명한 어머니의 통찰력 있는 조언으로 이따금 마주하는 벽도 시원하게 넘는다. 칼리드와의 관계를 고민하는 어머니의 대화에서 그 성장이 폭이 얼마나 넓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많은 연애를 한 스칼렛과 달리 칼리드는 8년간의 짝사랑에 첫사랑인 모태솔로인데 어떻게 이렇게 충만한 관계가 가능한지에 대해, 작가는 적절한 시기에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 말한다. 스칼렛과 구남친과의 대화에서 유추 가능하듯, 여주는 연애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많았고 애인만큼 중요한 사람들도 많았다. 모든 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지만 상대의 불안을 미리 알아채고 해소해줄 만큼 충실하지 않았고, 실패한 연애의 끝에 매번 자신도 많이 힘들었다 말하지만 제 일에서 실패하는 것이 더 뼈아픈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가 말하는 아픔과 사랑 역시 자기중심적인 기준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칼리드를 만나는 동안 그 낮고 허술한 허들을 깨닫고, 그의 사랑을 받으며 진짜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 대해 알게 된다. 우선 칼리드는 같은 공작가로서 그녀의 입장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고, 8년간 그녀를 생각하며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제 위치에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던 스칼렛은 만약 칼리드가 자신을 위해 변하거나 포기할 것을 바라거나, 주제넘게 일에 대해 충고했다면 관계는 망가졌을 것이며, 있는 그대로 봐 주고 기다려 준 그에 대해 감사와 사랑을 느낀다 말한다. 정말이지, 로맨스 소설에 너무나도 이상적인 남주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보답받으려 하지도 않고, 곁에서 지키고 사랑을 줄 수 있음에 행복해한다. 칼리드 시점에서 어느 정도 비틀린 속내라고 사연이 나오긴 하나, 비틀렸다고 보기엔 너무 인간적이고 도덕률에도 어긋남이 없어 이 정도면 보살이다.



또한 왕녀이자 사촌인 비올레타, 왕궁 연금술사인 올리비아, 유력가인 발터르 영애 등 여캐 간의 우정에 대한 서술 비중이 상당하고 진실하게 그려져서 추천하고 싶다. 이사벨의 우정이 거짓된 것임을 비교하는 잣대를 제시하기 위해서였겠지만, 로판 복수극에서 우정이라 하면, 아끼는 시녀 혹은 유능한 남성과의 관계로 설정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하지만 수직관계에서는 아무래도 충성심이라는 보조 장치가 있고, 남성캐는 주로 그들로부터 쓸모를 인정받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므로 모두 진짜 관심에서 발전된 우정이라 보기엔 어렵다. 


더하여, 걸크러시를 키워드로 여주의 활약을 전면에 내세우는 글에서, 장르를 불문하고 진짜 별거 아닌 사소한 걸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패턴이 빈번한데, 이 작품에서 그런 식의 허무하고 김빠지는 에피소드가 없어 좋았다. 연장 선상으로, 주인공을 주인공답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여캐들과 비교하며 깎아내림으로써 여주의 가치를 어필하는 패턴은 또한 반감이 들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는데, 이 소설은 거부감 없는 적정선을 유지한다. 표현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등장하는 여캐들이 한 부분씩은 다 여주보다 잘났기에 가능한 일이다. 여주보다 더 능력있는 직장 선배가 멘토로 있고, 더 현명한 어머니가 롤모델이며, 더 기특하고 보듬어주고 싶은 후배가 있고, 더 화통한 사이다 성격의 친구가 있다. 크든 작든 부러운 면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관계로 그려진다. 완성형은 아니지만 그녀가 성장하는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면 성장 소설로도 괜찮은 편이다. 





ㅣ 진입장벽을 넘어보자



복수극에서 가장 허무한 것은 상대가 알고 보니 쪼렙인 경우다. 또 대단하고 거창한 인물로 설정하더라도 정작 에피소드가 보잘것없으면, 얘는 정신 차리기 전엔 대체 얼마나 아둔했던 건가 싶어 한숨이 난다. 이 작품에서도 이사벨은 첫 등장부터 퇴장까지 너무도 볼품없는 수준이고, 그녀의 가문 역시 저렇게 멍청해서 반역이 성공할거라 믿었구나 생각될 정도다. 하지만 여주가 못 배우고 어리석어서 당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외교관이자 예비 정치인다운 말빨로 시원하게 상황을 타개하므로 복수극의 핵심인 사이다는 충분하다 하겠다. 


다만 한번 마음먹으면 칼같이 독하게 끝을 보는 유형의 인물인데, 그게 이사벨에게만 자꾸 기회같지도 않은 기회를 주니 답답한 면이 있다. 용서 안 해 - 진짜 용서 안 해 - 진짜 진짜 용서 안 해 - 진짜 진짜 진짜 용서 안 해의 패턴으로, 계속 이사벨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안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메우려 시도한다. 한두 번이면 인연을 끊어내기 위한 결정적 이유를 찾나보다 그럴 텐데 정말 숱한 반복이 이어지다보니, 이사벨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우정으로 나아가고 결국 포용하고 용서하는 스토리이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스칼렛은 결국 이사벨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용서 없이 어떠한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관계는 마무리된다. 반역으로 엮이면서 용서할래야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자신에게 한 잘못보다 칼리드에게 한 짓 때문에 결정적으로 끊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끝나는 게 여주의 성격에도 어긋나지 않고 깔끔하긴 하겠지만, 그럴거면 왜 그렇게까지 길게 여주의 생각을 반복했는가 의아함이 남는다. 굳이 의도를 찾자면 용서란 그토록 어려운 일이고, 인물의 성장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 했나 싶다.


여주의 머뭇거림과 별개로, 70화쯤부터 사건의 전말이 예상되고 100화쯤의 낭독회 에피소드 이후 모든 실마리가 풀렸음에도 이야기가 끝맺음 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거기다 새로울 것 없는 칼리드 시점과 주변인 이야기가 본편에서 연재되어 후반의 50편 정도는 관성적으로 읽은 면이 없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사실 그쯤 주2회 연재로 바뀌면서 연재텀이 길어져서 속도감을 느끼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 서평 쓰기 전에 다시 읽어보았지만, 감상은 마찬가지였다. 이야기의 짜임도 훌륭하고 인물의 캐릭터성도 좋으나 후반부 완급 조절이 아쉬워 기무 추천작으로 분류하였다. 하지만 이야기 구성에서 더 큰 즐거움을 찾는 독자라면 소장본으로 구매해도 좋겠다.


때때로 앞서 언급한 여주의 모순적인 면들이 고스란히 단점이 되기도 한다. 주인공이 사는 윈체스터는 기회의 평등과 능력으로 인정받는 현대의 사회상을 갖고 있다. 스칼렛네 공작가를 이끄는 사람은 공작부인 자신이며, 스칼렛 역시 후계자 다툼이나 잡음 없이 후계자로 인정받고, 사회에서 성별에 따른 제약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이는 능력 여하에 따라 기회를 얻는다. 그럼에도 신분제가 존재하므로 오늘날의 영국, 벨기에, 노르웨이 같은 입헌군주국을 떠올릴 수 있다. 왕실의 실권이 강하다는 점에서 태국과 유사하지 않나 싶다. 어쨌든 작중 배경이 오늘날과 다름없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문제 되는 갑질이 쉽게 연상되어서 여주 1인칭임에도 몰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응원은 할지언정 공감하긴 어려운 스칼렛과 나와의 입장차는 가끔 어떻게 생각의 흐름이 이렇게 되지 싶어 뜨악할 때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1인칭으로 시점을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3인칭이었다면 금수저이자 드라마퀸의 내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입장에 빙의하다시피 완전히 몰입하여 읽는 스타일이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다.  


'서평(스포주의) > 기무 추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녀의 애완동물 / 하르넨  (0) 2018.02.07
댓글